돌담길을 걸으며
돌담길을 걸으며
돌담길을 걸으면 발걸음보다 먼저 마음이 느려진다.
낮은 돌담은 마을의 오래된 숨결처럼 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둥글고 납작한 돌, 모서리가 닳아 순해진 돌, 빗물에 검게 젖었다가 햇볕에 다시 마른 돌들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있다. 누가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돌담에는 사람의 손때와 세월의 체온이 배어 있다. 흙 묻은 손으로 하나씩 돌을 고르고, 흔들리지 않도록 틈을 맞추던 어느 늙은 아버지의 등이 그 안에 남아 있을 것만 같다.
돌담은 말이 없다. 그러나 말 없는 것들은 때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담장 너머로는 장독대가 있고, 감나무 잎이 바람에 뒤척이고, 마당 한쪽에는 오래된 고무신이 비스듬히 놓여 있다. 어디선가 된장국 끓는 냄새가 낮게 번지고, 멀리 닭 우는 소리가 햇살 속으로 흩어진다. 그런 풍경 앞에서는 마음도 괜히 순해진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달려가도, 어떤 곳에서는 아직 밥 짓는 냄새와 흙냄새가 사람을 붙들고 있다.
돌담길에는 반듯함보다 정겨움이 있다. 도시의 담장은 선을 긋지만, 시골의 돌담은 경계를 만들면서도 사람을 밀어내지 않는다. 담은 낮고, 틈은 많고, 그 틈 사이로 풀잎이 돋고 작은 들꽃이 고개를 내민다. 담장이면서도 막지 않고, 경계이면서도 닫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런 돌담 같은 거리가 필요할지 모른다. 너무 높아 서로를 보지 못하는 벽이 아니라, 서로의 기척을 느끼며 조용히 곁을 지켜 주는 낮은 담 말이다.
나는 돌담길을 걸으며 오래된 마을의 표정을 읽는다. 툭툭 튀어나온 돌 하나에는 견딤이 있고, 움푹 들어간 틈 하나에는 지나간 비바람이 있다. 비가 오면 돌담은 더 짙어지고, 햇살이 비치면 돌마다 묵은 은빛을 낸다. 여름에는 담 밑에 봉숭아와 채송화가 피고, 가을이면 감나무 그림자가 담 위에 내려앉는다. 겨울이 오면 찬바람이 돌 틈을 지나가지만, 돌담은 웅크린 짐승처럼 조용히 마을을 지킨다.
돌담은 혼자 서지 않는다. 작은 돌들이 서로를 받치며 하나의 길을 만든다. 크고 잘난 돌만으로는 담이 되지 않는다. 모난 돌, 작은 돌, 납작한 돌, 이름 없는 돌들이 제각기 자기 자리를 얻을 때 비로소 담은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 사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눈에 띄는 사람만 세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말없이 밥을 짓고, 밭을 매고, 아이를 키우고, 하루의 고단함을 삼키며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돌담을 쌓아 왔다. 그들의 이름 없는 손들이 있었기에 한 마을이 무너지지 않고 오늘까지 이어졌다.
돌담길을 걷다 보면 지나간 시간이 가까이 온다. 할머니가 광주리에 나물을 이고 걷던 길, 아이들이 맨발로 뛰어가던 길, 저녁이면 소를 몰고 돌아오던 길,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던 길. 이제는 많은 것이 사라졌지만 길은 기억하고 있다. 사람은 잊어도 길은 잊지 않는다. 발자국은 지워져도, 그 발자국이 지나간 방향만큼은 어딘가에 남는다.
때로 삶은 돌담을 닮았다.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하루씩 쌓인다. 기쁨 하나, 슬픔 하나, 실패 하나, 용서 하나, 견딤 하나가 서로의 틈을 메우며 조금씩 삶의 모양을 만든다. 어떤 날은 마음의 돌 하나가 빠져나가 담이 무너질 것 같고, 어떤 날은 아무리 애써도 빈틈이 채워지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은 서툰 손으로라도 다시 돌을 올리게 한다. 무너진 자리에는 다시 쌓는 법이 있고, 흔들린 담에는 더 깊은 뿌리의 기억이 생긴다.
돌담길에는 오래된 위로가 있다. 그것은 화려하지 않고, 크지도 않다. 다만 지나가는 사람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는 듯하다. 괜찮다, 너무 곧게만 살지 않아도 된다. 조금 비뚤어져도, 서로 기대어 있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반듯한 벽돌이 아니어도, 제 모양대로 놓이면 하나의 담이 된다. 사람도 그렇다. 상처 난 모양, 모난 성정, 남루한 기억까지도 삶 속에 제 자리를 얻으면 어느 날 한 사람의 깊이가 된다.
나는 돌담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새것에만 있지 않다. 닳은 것, 오래된 것, 조금 기울어진 것, 사람의 손길이 묻은 것에도 아름다움은 오래 머문다. 돌담은 낡았으나 초라하지 않다. 세월을 견딘 것들은 언제나 조용한 품위를 가진다. 오래된 사람의 얼굴처럼, 오래 입은 무명옷처럼, 자주 쓰다듬은 나무 문지방처럼, 돌담은 세월을 입고도 여전히 따뜻하다.
해가 기울면 돌담 위에 노을이 앉는다. 그 빛은 금세 사라지지만, 사라지는 것들만이 줄 수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그 길에서 문득 내 삶도 어느 마을의 돌담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높이 솟지 않아도 좋다. 다만 누군가의 길가에 낮게 서서, 바람을 조금 막아 주고, 그늘을 조금 나누고, 마음이 지친 사람이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돌담길을 걸으면 세상은 조금 덜 낯설어진다. 흙냄새, 풀냄새, 오래된 돌의 냉기,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람 사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잊고 있던 고향의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모두 어디선가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흙으로 돌아갈 사람들이다. 돌담은 그 사실을 서럽지 않게, 담담하게 알려 준다.
나는 천천히 걷는다. 발밑에는 흙길이 있고, 곁에는 돌담이 있다. 바람은 낮게 불고, 들풀은 돌 틈에서 흔들린다. 그 순간 삶은 멀리 있지 않다. 이름 없는 길 위에, 오래된 담장 곁에, 내 발걸음의 느린 박자 속에 있다.
돌담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오래된 시간 곁을 걷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나도 한 개의 돌처럼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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